결 거칢에 대하여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함이다.

내 삶에 적용하기

  • 남과 비교하는 것을 멈추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라.
  • 회의하는 자아로 살아가기.(매일 자기 반성 일기쓰기 + 타인의 견해 비판적 수용)
  • 현존, 지금 존재하기
  •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외로움과 불안 등 심리적 불안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등가교환) 이를 극복하고 즐길 수 있는 독립성을 갖춰라. 이러한 독립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와 지향점을 바탕으로 신념을 세우자.

[나의 신념]

  1. 나의 적극적 자유를 찾기 위해 회의하는 존재적 자유인으로 사는 것
  2.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것.

펀치 라인

[7가지 사회악]

  1. 원칙없는 정치
  2. 노동 없는 부
  3. 양심 없는 쾌락
  4. 인격 없는 지식
  5. 도덕 없는 상업
  6. 인간성 없는 과학
  7. 헌신 없는 신앙

자유를 얻는 방법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는 이유는 물질의 결핍 상태가 지속 될 수 있으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자유나 사람됨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의 소유물과 그가 속한 집단, 계층에 관심이 있다. 자본 주의 사회에서 중요한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가 가진 구매력이기 때문이다. 구매력을 높이거나 유지하기 위한 긴장만 남은 것, 그래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관심이 없는, 자기 형성의 자유를 일찍부터 내던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모습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권력과 물질이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에 지배와 복종에 맞서겠다는 자유인은 모순적인 존재일 수 있다. 자유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속 사회에서 패배자가 되어야한다. 인간 사에서 아나키스트는 자유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거의 숙명처럼 패배자의 길을 걸었다.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계속 노예로 편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편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앞에서 자유의 참된의미는 점점 더 힘을 잃고 있다.

자유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며, 이 기본적인 물적 토대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조건이기도 하다. 춥고 배고픔이라는 가난과 그런 결핍 상태의 지속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한다. 양극화 된 사회, 승자독식의 구조 아래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합리적 선택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자원조차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부단히 던져야한다. 나를 잘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과 비교하는 일을 멈춰야한다. 남보다 우월한 나를 추구한다면, 내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이 된다. 그런 삶에서는 나를 짓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

자유는 외로움과 불안의 조건 아래 얻을 수 있으므로 자유인은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하며, 심리적 불안을 극복 할 수 있는 독립성을 갖춰야한다. 외로운 존재인 나를 대면하는 또 하나의 나를 상정하여 그 둘 사이에 소리없는 대화(삶의 의미+지향=신념)를 나누는 것은 외롭고 불안한 나를 자유로운 존재로 지킬 수 있는 길의 하나다. 내면이 탄탄한 사람일 수록 자유의 대가(외로움, 심리적 불안)을 잘 이겨낼 수 있다. 외롭고 불안한 개인들은 집단 속에 안주하고 싶어하고, 집단 중에서도 다수파에 속하고 싶어 한다. 다수파에 속한 개인들은 성찰적 자아가 되기 어려워 반성적 삶을 살지 않고 지배체제가 요구하는 톱니바퀴의 일상에 충실하게 복무할 위험이 있다. 그런 일상에 갇혀 사유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조차 비판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자유의 정의

자유를 ‘내 멋대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유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은 나의 ‘내 멋대로’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을 통해 금세 알 수 있다.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까지만 인정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기주의 vs 개인주의]

  • 이기주의 :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 이익을 침해하면서 자기만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려하는 것
  • 개인주의 :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 아래 각자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것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모순적 태도는 남에 비해 내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극적 자유 vs 적극적 자유]

  • 소극적 자유 : 남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
  • 적극적 자유 : 내 삶과 나의 결정이 외부의 그 어떤 힘이 아닌 오로지 나로부터 비롯. 적극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참된 나’와 비합리적인 영향으로 ‘왜곡된 나’를 구분하도록 요구한다.

나의 자유의지가 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내 생각이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거나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을 배반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한다.

[소유적 인간 vs 존재적 인간]

  • 소유적 인간 :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
  • 존재적 인간 :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김.

‘스스로 족함’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가난할지라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곳.

회의하는 자아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함이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하다. 고칠 필요가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결함 vs 고귀함]

  • 고귀함 : 고귀함의 ‘귀함’이 뜻하든 태생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거나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자의 몫이다.(제로섬 게임) 타인의 비천함을 필요로한다.
  • 고결함 :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닌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다. 타인의 비루함과 비천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고결함이 타인의 고결함을 이끈다.

모든 사람이 고귀함을 추구하지만 성취 가능성은 거의 없다. 슬프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가능성 없는 목적 때문에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고결함의 길을 찾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고결하게 자신을 지을 수 없게 억압하는 사회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도 제도적 가난이 자발적 가난의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고결함을 지키려고 자발적 가난을 받아 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강요된 가난을 낳는 제도나 사회 구조에 분노할 줄 알고 이에 맞서 싸울 것이다.

이 땅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욕망과 불안이다. 그래서 끝없는 경쟁이다. 욕망을 관철 시키기 위해서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경쟁은 욕망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욕망에 포획되는 대신 욕망을 우리 사회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열정으로 바꾼 사람을 부르고 있다. 우리는 욕망을 매개로 물신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자아실현과 자유의지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자기가 속한 사회에 자신을 작용시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하며, 매슬로도 이를 최고 단계의 욕망으로 규정했다. 생존에 대한 불안 때문에 잠시 미룰 수는 있어도 자아 실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자아 실현은 인간의 본성이다. 일상적인 삶의 궤도와 관성을 반성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수정하거나 이탈하여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용기를 갖도록 하는 것도 자유의지다. 물질적 욕망을 부추겨온 주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부귀영화를 쫓던 삶의 덧없음을 불현듯 느끼고 고결한 삶의 길을 찾도록 눈빛을 형형하게 해주는 것 또한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누구나 갈 수 있었던, 각자 나를 고결하게 짓는 소박한 자유인의 길,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세상에 압도되어 유보했던 길을 다시 찾아야한다. 불현듯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순간이 다가올 때 이를 외면하는 대신, 그 순간을 직시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대화하여 삶의 변곡점으로 만들어야한다.

자유를 지향하고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몸이 거하는 모든 곳(집,일터,배움터 등)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가 되어야한다.

수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면 그것은 곧 자유다. 우리가 만약 자유를 잃어버린다면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흥미도 느낄 수 없게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르는 노예다. 노예지만 노예인지도 모르니 평안하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오늘 날에는 은밀히 노예가 된 경제 동물이 양산되고 있다. 전인적 인간이 사라지고 자유 지향도 사라진다.편하게 살려면 굴종하라

몰상식, 부도덕과 불의에 맞서는 자유인의 무기는 저항과 연대다.

자유의 출발점 : 몸의 자유

인간은 자기 형성의 자유를 위해 오랜 투쟁과 희생의 시간을 거쳐왔다. 먼저 몸의 자유를, 그리고 종교,사상,양심,표현,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쟁취했다. 인간은 자기를 형성할 자유를 위해 전진해왔는데, 그 출발점이 몸의 자유에 있었다.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 vs 회의하는 자아를 지닌 사람]

  •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 : 사유 세계의 문을 닫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
  • 회의하는 자아를 지닌 사람 : 완성 단계에 이르기는 커녕 언제나 부족하다는 점, 수많은 오류에 빠져 있따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유 세계의 문을 열어놓는다.

세상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이유는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회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의 사유 세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보고 좀 더 정확한 진리에 다가서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편견과 오류를 멀리하도록 나의 사유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야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진정한 진리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구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 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하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것에 의문을 품고 생각하라.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이 생각하는 사람의 조건이며 출발점이다. 이 물음을 부단히 던져야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들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서, 정리되어 있거나 아니거나 내 삶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담겨 있으므로 내 삶의 지향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들이 어떤 것들이고 어떤 경로로 갖게 되었는지 묻고 생각해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만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생각하지 않으면 그 주체인 ‘나’도 없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복종하는 상징 폭력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까지 의문을 품고 생각해라. 타인의 말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사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

한국의 교육 과정은 이미 사회계층의 단순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으로 공고히 자리 잡혔다. 양심적인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계층 상승의 헛된 희망을 갖게 하기 보다는 비판의식과 주체적 의식을 갖게 해야한다. 사회 양극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상층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부추기기 보다 그 양극화 구조를 혁파 할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대학생들의 사회문화적 인식의 수준은 스웨덴의 중학생 수준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청소년 시절 거의 모든 것을 저당 잡힌 채 학습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얻는것은 무엇인가? “회의하지 않는 사람, 즉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지배 새력이 선정한 생각을 정답으로 주입 받았기 때문에,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회의할 줄 모르고 고집을 부리며, 이미 완성된 존재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한국의 대다수 피지배 대중이 보여주고 있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각자가 자기만의 래디컬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모두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 겸손함이 필요하다. 의지로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 나부터 변화하고 성숙하자. 나도 수시로 설득된다는 조건 아래 내 주변을 설득해야한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한번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내 생각들은 내가 선택한 것일까?

내 생각들은 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창조한게 아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각들을 고집하며 살고 있다. 과연 나는 내 삶의 주인일까? 나는 지배 체제의 로봇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입력하고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과 나는 얼마나 다를까?

나의 자유 = 타인의 자유

타인의 고통이나 행복의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감 능력인데, 단순히 공감에 그쳐서는 안되고 그 고통과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야한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면 타자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모해야한다.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에는 관심도 없으니 분노를 느끼지 않는 반면, 호감을 갖고있는 정치인, 연예인이 겪는 고통과 불행에는 내가 겪는 것처럼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분노의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해석할 때 주의할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 할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1.단순화하기 2.전문가에게 맡기기’이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특정 집단의 생각을 저항 없이 수용한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알고리즘 역시 모든 시민들을 서로 모순되는 정보와 부딪히지 않은 채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투표권을 허용한 이유?

1인 1투표 시스템을 가진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소수가 다수를 통제 할 수 있을까?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한게 19세기 후반의 일인데, 일부 급진적인 분석가들은 당시 지배 세력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투표권을 준 것은 이미 그들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위 80%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상위 20%에 속하게 되리라는 욕망을 갖고 있어서 미리부터 상위 20%의 편을 드는 것이다. 이렇게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생각과 욕망을 지배 당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며 소수가 다수를 통제 할 수 있게 만든다. 노동자 계급이 이 함정에 빠져 연대의식을 상실해가고 있을때, 부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연대 의식을 고취시킨다. 하위 80% 중 노동자 의식을 가진 사람은 무척 드물다.

로마시대 때 부터 사용되었던 분할 통제 역시 소수 지배 세력이 다수를 통제하는 가장 유효한 방식 중 하나였다. 오늘날로 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리하여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분할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역시 계급 의식은 커녕 기초적인 사회 비판 의식과도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자본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비판적 사회 인식 대신 상징 폭력을 통해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학생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는 대신, 지배 세력이 선택한 생각을 주입받아 획일적으로 암기하는 경쟁의 장이다.

학교와 사회 환경에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한 사회 구성원은 미디어를 통해 그 의식을 끊임 없이 단단하게 다진다. 미디어는 불안과 공포를 주입한다.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닌 불안이다.) 한국의 대중은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라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단 체제 아래 어린 시절부터 질서 이념을 끊임없이 주입받고 단단히 다져온데다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그러나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라 불렀다.”

나를 찾지 못함에서 오는 혐오

타자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이해하려면 나부터 독립적인 주체가 돼야한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면 자기 정체성 부터 확립해야한다. 한국 사회에 혐오가 만연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찾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 과정에서 나조차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곳에 머물려 해서는 안된다 타자의 생명을 존중하고, 타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나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불안과 자유

불안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각자가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불안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은 소유에만 관심이 있고 소유물이 무엇이며 얼마나 되는지가 그사람의 가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더많이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물질적 소유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각 개인은 소유욕의 포로가 되어 자본 앞에서 자발적 복종이나 굴종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자유인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자본과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은 결코 ‘지금’을 누리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소중한 ‘지금’을 온통 저당잡힌 세월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

UBI를 통한 보편 복지의 확충하여야한다.또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연대의 정신과 성숙한 정치다. 우리사회에 ‘가난의 상태’가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할 때, 시민들의 적극적인 연대활동과 올바른 정치참여만이 그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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